1. 어제의 우생학
우생학의 탄생
우생학은 19세기 후반에 탄생했다. 당시는 과학만능주의라고 해도 될 만큼 과학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우생학의 사회적 해악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이 과학적인 것에 대한 추종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미국은 수많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거세시켰으며, 나치 독일은 장애인, 유대인, 집시를 집단 학살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에서 생존 경쟁을 통한 자연 선택이 생물 종의 진화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생물학의 영역에만 한정했지만, 이 진화론은 당시 자유주의와 같은 사회철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한 공리주의자인 스펜서는 진화의 생존 경쟁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게으른 인간이 소멸되는 것이 자연 법칙의 순리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에게 복지 정책은 적자생존이라는 자연 법칙을 역행하고 허약한 형질을 퍼뜨리는 잘못된 국가 정책이다.
우생학이란?
우생학은 이런 배경 위에서 탄생했다. 우생학Eugenics은 eu+genos의 합성어로, eu=well, genos=born으로, 잘난 태생에 대한 학문이다. 이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은 다윈의 조카인 프랜시스 갈톤으로, 우생학을 “사회적 통제아래에 다음 세대 인류의 질을 향상시키거나 저하시키는 원인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했다. 그는 나쁜 형질의 유전을 최소화하는 ‘부정적 우생학’과 좋은 형질의 유전을 극대화하려는 ‘긍정적 우생학’으로 나누었다. (그는 초기에는 신중한[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간의]결혼을 통해 천재를 배출 가능하다는 긍정적 우생학을 주장하다가, 후기에는 평균 이하 월급을 받는 사람들의 자녀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부정적 우생학을 강조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그 기준이 평균 이하 월급이라는 점이다) 놀라운 점은 오늘날 미쳤다고 생각이 들 만한 이런 생각이 받아들여져서 영국에는 1904년 국립 우생학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곧이어 우생학 교육학회와 학회지가 창간되었다.
독일의 우생학
우생학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회 부적격자를 거세하는 것까지 이른다. 빌헬름 샬마이어와 알프레드 플로에츠라는 생리학자들이 독일 ‘국가의 꽃’인 신체 건강한 청년들은 전장에서 사망하는 반면 징집에서 면제된 허약한 남자만이 고향에서 2세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생학자들은 이러다간 허약한 국민만 남겠다며 우생학이 허약자와 병자의 생식을 막아(거세)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독일도 1904년 우생학 학회지가 창간되고 1905년 우생학 학회가 만들어진다.
독일에서의 우생학의 영향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더욱 만연해진다. 그들은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독일 민족이 미래 지향적이고, 강인하며, 인내심이 많고, 철학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가장 우수하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나치즘의 골자를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몫을 형성했다. 히틀러는 이 주장을 나치즘의 핵심 원리로 포함시킨다.
이후 여러 법이 제정된다. 대표적으로 Law for the Restoration of the Professional Civil Service(모든 非아리아인은 정치적 의견을 낼 수 없고, 공공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특히 유태인은 일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상점과 관공서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된다. 여기서의 유태인은 자신의 조부모 중 한 사람이 유태인이어도 해당된다])가 1933년 4월에,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률Law for the Prevention of Hereditarily Diseased Offspring(물리적, 정신적 약자, 유전병을 가진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불임 수술을 해야 하는 법. 동시에 만성 실업자chronically unemployed, 창녀prostitutes, 거지beggars, 알콜중독자alcoholics, 부랑거지homeless vagrants, and 집시Romani people와 같은 사회부적응자들은 감옥에 가거나 나치강제수용소에 수감되는 법)등이 제정되었다. 이들은 본인들이 규정한 ‘허약자’들을 거세하고, 심지어는 허약자들(불구 아동을 포함해)은 살 가치가 없으며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해친다는 이유로 국가가 안락사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집단 안락사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우생학
한편 미국의 우생학은 거세법과 동시에 인종 차별적 이민법을 가져왔다. 인디애나 주가 1907년 정신병자, 백치, 강간범을 거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이유 없이 흑인들과 유색인종을 거세시키는 데에 이용되었다. 이런 인종차별과의 결합은 미국 우생학의 특징이었는데, 대번포드와 같은 인종차별우생학자는 이민자들의 열등함을 보이기 위해서 이민자들의 낮은 아이큐를 증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는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들에게 영어로 아이큐 테스트를 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였다.
*벅 대 벨 사건 : 불임법에 합헌 판결을 내린 사건. 버지니아 정신병원에 있는 열일곱 살 미혼모 캐리 벅에게 불임 명령을 내린 것. “국가는 공공복지의 이름으로 최고의 시민에게도 그들의 삶을 위한 명목으로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힘을 빨아먹는 사람들에게 이만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면 이상한 노릇이 아닌가. 부적격 자손이 죄를 지어 형 집행을 기다리거나 지적 능력이 너무 떨어져 굶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누가 봐도 부적격자라면 그런 사람이 대를 이어 태어나는 일을 사회가 막을 수 있다면, 그게 사회 전체를 위해서 낫다.” 판결을 내린 홈스 판사는 캐리 벅의 모친과 그녀의 딸 역시 정신박약이라는 점을 들며 “3대에 걸쳐 정신이 그토록 박약하다면 충분하다”고 결론지었다.
우생학자들은 가난과 무능력은 유전이기 때문에 개선될 수 없고 거세와 같은 우생학을 통해서만 해결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사회적 요인을 무시하고 모두 유전적 요소로만 사람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재분배에 인색한 보수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었다.
20세기 우생학의 그늘
사람이 똑똑하거나 건강한 자식을 원하듯, 한 사회가 똑똑하고 건강한 세대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욕구로 보일 수도 있다. 때문에 우생학의 의도는 좋으나 거세나 인종 청소와 같은 방법론만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생학은 강제적 법령, 수술, 대중 선전, 특정 사회 그룹―대부분 약자―의 희생, 정상과 비정상의 엄격한 구분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우생학은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동반한다. 이것이 20세기 우생학의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2. 오늘의 우생학
그런데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우생학을 완전히 멀리하게 되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를 거치며 본인 스스로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오늘날의 우생학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너무나 당연한 방식으로 있다. 지금부터는 오늘날 우생학이 어떤 방식으로, 이름과 방법론을 약간만 바꾼 채 우리에게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는지를 이야기해보자.
우생학은 왜 나쁜가?
그런데, 이런 물음이 생길 수 있다. 과연 우생학은 나쁜가? 나쁘다고 한다면 왜 나쁜가? 그저 예전에 나빴기 때문에 우생학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우생학만큼이나 나쁘다. 우생학을 반대한다면 어떤 부분 때문에 우생학은 잘못되었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과연 우생학은 나쁜가? 나쁘다고 한다면 어떻게 나쁜가?
생각보다 우생학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례가 있다. 청각장애를 가진 레즈비언 부부가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그들의 자녀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도록 했다. 그들은 듣지 못하는 것도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이고,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는 무언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느낀다. 무엇 때문인가? 크게 두 가지가 될 수 있겠다. 1) 청각장애가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청각 장애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이 사례가 나쁜가? 그러니까 이 경우에 그들에게 듣지 못하는 일은 쌍꺼풀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2) 부모가 아이를 원하는 대로 결정한다는 점이 껄끄러울 수 있다. 말하자면 자율성을 빼앗았다는 말이다. 이 경우는 조금 더 이야기를 진행한 후에 다시 말하도록 하자.
유전적 제비뽑기
이런 경우는 어떤가? 하버드대학의 학보에는 다음 같은 광고가 붙었다. 난자 공여자를 찾는 광고였는데, 키 175cm 이상, 튼튼하고 몸매가 날씬한 여성으로 가족의 병력에 문제가 없어야 하며, SAT점수가 1400점을 넘기는 여성에게 난자를 받는 대가로 5만 달러를 지불하겠다는 광고였다. 이 경우도 도덕적으로는 조금 찜찜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앞선 청각장애인 부부의 그것보다는 덜 불편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례가 앞선 사례보다 비난을 덜 받았다.
물론 앞선 사례와 이 사례의 가장 큰 맹점은, 어떤 정자와 어떤 난자를 받는다고 해도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는 순전히 ‘제비뽑기’다. 그러니까, 앞선 아이의 자율성을 빼앗는다는 말은 조금은 부적절하다. 어차피 전부 운이라는 말이다. 또한 유전적 형질이 얼마나 있더라도 그 유전적 형질뿐만 아니라 집안의 사정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한 사람의 성장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곤 한다. 따라서 아이의 자율성 문제는 조금 논하기 까다롭다. 어차피 모두 운이기 때문이다.
건강함은 선인가? (1)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야할 문제는 건강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우생학의 소기 목적 또한 강한 민족을 만들기 위함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건강함이란 어떤 가치인가?
1) 건강이 인간의 행복과 자기완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가? 2) 그렇지 않다면 건강이란 행복과 자기완성과 같은 것으로 치환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선이라고 생각하는가?
1)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건강이라는 개념을 공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줄리언 사불레스쿠는 “건강에는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도구적 가치만 있다. 자원의 일종으로,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때 활용하는 것이 건강”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치유와 강화가 구분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의 잠재력을 방해하지 않는 건강이라고 한다면, 달리지 못하는 절름발이를 고치는 일과 100M를 11초 안에 뛰지 못하는 평범한 다리를 우사인 볼트의 그것으로 만드는 일은 다르지 않다.
건강함은 선인가? (2)
하지만 건강을 도구적으로 보는 입장은 우생학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1920년대 미국 우생학자들은 주 단위 축제에서 건강 콘테스트를 열고 ‘생존에 가장 적합한 가족’에게 상을 주었던 적이 있다. 여기에는 생존에 적합한 = 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정상성에 대한 환상이 있다. 심지어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건강을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행복과 치환 가능한, 도구가 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체(의 건강함)을 건 무한한 군비 경쟁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정상 상태에 대한 환상이 우리를 끝없는 경쟁 상태로 몰아간다는 말이다. 키 작은 아이에게 호르몬 주사를 맞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혹은 치아 교정의 그것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치료인지 강화인지는 정말 애매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키 180 이상에 시력 2.0 이상을 만드는 시술 정도는 너무나 당연한 치료가 되는 시대를 상상해보라. 언젠가 타이슨 정도의 핵주먹을 가지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 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자유주의 우생학?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그래서 이게 왜 나쁜데? 라고 묻더라도 대답하기는 아직 어렵다는 말이다. 우생학이라는 단어에 ‘부당하게’ 덧입혀진 강제성과 차별적 태도를 걷어내어 순전히 자율에 맡기는 ‘민간 부문’의 우생학이나 ‘자유주의’ 우생학에는 잘못이 없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생학이 도덕적으로 그릇된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강제성이 없더라도, 다음 세대의 유전학적 특성을 통제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그른 점이 있는가?
평등한 세상?
사실 ‘유전학적’으로 다음 세대를 조절하는 것은 차라리 ‘평등한’ 사회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스카이 캐슬>과 같은 드라마를 생각해보자. 천문학적인 비용을 자녀 교육에 들이는 부모와 경제적으로 그렇지 못하는 부모가 있다고 가정할 때, 후자의 부모가 합리적인 가격으로 아이의 유전적 특성을 개선하여 전자의 자녀의 능력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경우에 국가적 강제성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이 시술을 원하는 부모와 아이가 선택할 뿐이다.
자유주의 우생학 - 싱가폴의 경우
철학을 잘 하는 방법 중에는 어떤 질문에 순진하게 답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상대방이 만든 질문지 위에서는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과연 강제성 없는 우생학이란 가능한가? 1980년 싱가포르에서는 ‘자유로운’ 우생학이 시행되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의 출산율은 떨어지고, 교육 수준이 낮은 여성의 출산율은 높아지는 일을 두고서 세대가 지날수록 인재가 감소할 것을 두려워 한 리콴유 수상은 어떤 정책을 벌인다. 이 정책은 교육 수준이 높은 여성들을 위한 국가 지원 온라인 소개팅 서비스, 대졸 여성 출산시 지원금, 학부 교과과정 중 ‘연애’ 교과 신설 등과 동시에 교육 수준이 낮은 여성들의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여성들이 불임수술을 받을 경우 아파트 전세 계약금인 4천 달러를 지원했다.
이 경우는 말 그대로 ‘자유롭’다. 하지만 진실로 자유로운가? 삶의 전망이 제한적인, 그리고 넓은 부분에서 바라보기 힘든 저학력자에게 4천 달러는 충분히 강제적이지 않은가?
진짜 자유로울까?
이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면 이런 경우는 어떤가? 만약 교육을 통해 지능을 높이는 방식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지능을 높이는 방식 간에 차이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는 곧바로 국가의 강제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국가는 부모에게 아이를 학교에 보내도록 강요하지 않는가? 만약 앞선 건강이 자기 잠재력의 완성에 도구로 쓰인 것과 같이 지능도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는다면, 안전상의 위험이 없다면 언젠가 IQ 강화도 부모에게 의무화될 수 있다.
3. 선물 받은 삶
인류의 강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끌어 오는 내내 이 자유주의 우생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미래 세대의 인류를 더 오래 살게 하고, 재능과 성취를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강해지고자 하는 노력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실 나도 이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SF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런 영화들 속에서 대부분 인간은 가장 약한(물리적으로도, 수명에 있어서도) 생명체로 등장한다. 범우주 시대에 인간이라고 하면 적어도 맨몸으로 사자 정도는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자율과 평등으로는 부족하다.
앞선 자유주의 우생학, 그러니까 미래 세대의 인류의 강화를 찬성하는 입장을 북미 도덕철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이 취해왔지만, 독일의 하버마스는 이에 반대한다. 나치즘의 영향이었을까? 하버마스는 우생학을 반대하는데, 그는 자신의 반대 논거는 자율과 평등이라는 자유주의의 원칙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적인 개입은 태어날 자식에게 자신의 삶을 결정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고(자율),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대칭적 관계가 파괴된다는 말이다(평등). 부모가 자식의 유전적 형질을 결정하는 순간, 이 경우의 부모와 자식은 상호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어차피 태어나는 자식에게는 자신의 유전적 형질을 결정할 선택권이 없다. 부모가 선택해주던, 자연이 우연하게 선택해주던 어차피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음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전적 개입보다는 환경의 영향이 대부분 더 크다. 유전적으로 운동을 잘 하게 만드는 것보다 골프를 치게 하기 위해 4살부터 골프채를 쥐어준 우즈의 부모가 유전적 통제를 하는 부모보다 아이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완전히 유전자를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면 결국 제비뽑기다. 어떤 형질이 발현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유주의의 원칙에 기대어 자유주의 우생학을 비판하는 것은 그 논거가 부족하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율과 평등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우연성 속의 자유
때문에 하버마스는 자유 개념을 한 번 비튼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자유를 경험한다고 말할 때, 사실은 그 대상을 우리 맘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자유를 추구한다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자유롭지 않다고 하는 말에 있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보라). 출생 또한 우리 맘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 포함된다.
즉, 우연성과 자유 두 가지 개념은 연결된다. 내가 나의 탄생하는 순간, 출생의 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시작의 우연성과, 이렇게 시작된 삶에 우리가 윤리적인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요소라는 말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칸트의 말을 빌려오자. 그는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윤리학은 자유의 법칙을 따른다. 자유란 자연적 인과 연관을 끊고 스스로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힘, 곧 자유 의지의 행위 규칙, 다시 말해 자율을 말한다.”고 적었다.
만약 우리가 우생학이나, 유전공학의 힘을 빌려 인간 출생의 우연성을 정복하려고 시도한다면, 더 이상 인간에게 자율성 논의와 윤리학이 설 자리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마치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선물과 같이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선물 받은 삶
우생학, 그리고 유전공학은 계획적 의도가 주어진 것보다 우월하고, 경외보다는 지배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틀에 맞게 찍어내는 것에 높은 지위를 부여한다. 이런 태도는 경계할만한 부분이 있다. 왜 그럴까?
우생학과 유전공학의 문제점은 그것이 선물로 주어진 삶에 대한 인식을 무너뜨린다는 점에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겸손과 책임의 연대
겸손 :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신화가 현실이 된다면 재능을 선물로 부여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 결과물로 여기는 관점이 팽배해질 것이다.
책임 : 강화제를 먹지 않고 출전한 선수에게 쏟아지는 비난, 다운증후군이나 유전질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의 부모에게 쏟아지는 비난 등이 해당된다.
연대 : 보험이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의 상호연대. 유전 강화가 자신의 건강함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면 그 사람들은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유전 강화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층과 그 반대의 사람들 사이의 격차가 심화(강화를 통해 건강해지지도 못하고, 보험이 사라지니 그 건강하지 못함에 의한 징벌적 의료비를 통해)된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말은 곧 건강과 행복을 누리는 사회 구성원이 그렇지 못한 사회 구성원에게 갚아야할 빚이 있는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답은 그렇다. 자신의 건강과 행복과 자연적 재능은 그들 자신의 행동의 결과라기보다는 좋은 운 때문이다. 즉, 유전적 제비뽑기다. 우리의 유전적 재능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성취물이 아닌 주어진 선물이라면, 그 재능으로 시장경제에서 얻은 수확물이 본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고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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