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의 리바이어던의 3부는 <그리스도교 코먼웰스에 대하여>로, 그 이름답게 그리스도교의 코먼웰스에 대해서 논한다. 중세가 끝나며, 종교로 인해 살인과 전쟁, 약탈과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마당에 그는 왜 다시금 그리스도교를 논하는가? 그를 위해서는 그의 리바이어던의 앞 내용, 자연권과 계약설을 짧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능력의 평등으로부터 목적을 얻고자 하는 똑같은 희망이 생긴다. 두 사람이 동일한 대상에 대해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나, 서로 만족하지 못할 때 두 사람은 적이 된다.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을 반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다.’ 그렇기에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bellum omnium contra omenes에 있으며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때문에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다homo homini lupus’ 이런 상태이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비참하고 괴롭고 잔인하다.’
이런 홉스의 주장에서 인간을 위로하는 것은 인간이 이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법이라는 선천적 규범을 따름으로써 자기 파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이성의 명령이자 제1자연법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한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없을 때 전쟁의 이로움과 도움을 추구하고 이용할 수 있다.” 이 문장은 두 가지를 함축한다.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르라”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방어하라”는 말이다. 평화를 추구하라는 말이 그의 자연법 첫 자리에 놓인 이유는 홉스 정치철학의 목적이 평화의 안정적 확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말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계약이란 칼이 없으면 말에 불과하다”라는 홉스의 말처럼 자연상태의 지속이 고통스러워 상호 적대를 중단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는 일까지는 이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말만으로는 자연법의 추구, 그러니까 평화의 추구가 일어나지 않는다. 홉스는 여기서 의무를 위반한 사람을 처벌할 힘을 만드는 일을 제안한다. 의무를 위반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의무를 위반한 이득보다 처벌이 더 크면 될 것이다. 이는 처벌 규정을 만들고 집행할 힘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즉, 통치자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다. 홉스는 앞선 말로 계약하는 것을 ‘예비적 계약’으로, 통치자의 권위를 세우는 일을 ‘정치적 계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통해서만 ‘자기보호를 위해 평화를 추구하라’라는 자연법의 제1명령이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통치자는 홉스에 따르자면 올바른 이성의 법칙인 자연법을 지켜주는 존재로, 오늘날 우리가 그의 주장을 들을 때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독재는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더욱 강한 독재자가 있을수록 자연법은 지켜지고 자기보존은 더욱 확고해진다. 때문에 그에게 통치자는 자신이 만드는 실정법 위에 서며, 심지어는 세속화된 신과 동의어가 된다. 홉스에게는 통치자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의 정치철학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는데, 그것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민사회에 해로운 하나의 학설인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죄악’이라는 학설”이다.
이 양심은 기존의 양심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기존에는 양심이란 국가의 실정법과는 다르게 하나님에 대한 양심으로, 이 양심에 의해 안티고네는 오빠의 장례를 치르다 사형당하고, 그리스도교를 위해 수많은 순교자들은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신이 사라진 사회에서의 양심은 개인의 것이거나, 도덕 철학자들의 행동 방침에 의해 교육된다(뒤르켐이 가톨릭 교리문답집을 따라 도덕 교과서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러한 양심에 대한 의미전환은 곧 개인의 결정권에 대한 허락으로 이어진다. 도덕이란 신의 이성이 아닌 일반 인간 선생이 가르치는 것이고, 양심은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는 것이다. 이는 곧 올바름에 대한 여러 의견의 가능성으로 이어지고, 이런 생각들이 다양해지고, 힘을 가지게 될 시에 곧 반란이나 내전의 가능성이 생긴다. 홉스에게 이 내전과 반란은 자연상태로 돌아감을 뜻하므로 그의 철학을 따라가자면 이것을 금지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리바이어던에서 그는 말한다. “법은 바로 공적 양심이고, (계약을 통해)공적 양심의 지도를 받기로 결정했다”라고 말이다. 그가 자신의 생존권이 위협받기 이전에는 통치자에 대한 권리 일임 계약을 포기할 수 없다고 덧붙인 것은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그가 양심에 관해 분석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양심’의 성스러움에 대해 세속화를 불러일으킨다. 즉, 숭고함이라던가 성스러움이라는 말로 접근을 불가하게 했던(더욱 다가가면 신성모독이라는 말로 금지시켰던) 지점을 이성적으로 분석 가능한 것으로 바꾸었다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마치 종교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이상의 분석을 막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것은 통치자를 법의 바깥에 서는 유일한 자로 상정하는 일이다. 결국 다시 신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 과정 속에는 종교 또한 통치자의 아래에 선다. 이로써 통치자는 법 밖에 서서 법을 집행하는, 초월적 세계에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세속화된 신이다. 이는 사실상 어거스틴이 신국론에서 주장한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의 역사관에서 전혀 달라진 점이 없다. 창조된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타락하게 되어 서로를 죽이게 되고, 절대권력을 가진 통치자 밑에서 이성의 법칙을 따르게 되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서사는 여전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홉스의 주장을 권력자와 인간 전체를 보는 큰 시점으로 보지 말고 그의 리바이어던 안에 사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도록 해보자. 만약 지금 내가 있는 나라의 통치자가 완벽하지 않다면 어떨까? 때문에 전쟁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어떨까?(이 전쟁은 외부에서의 전쟁과 내부에서의 전쟁[내전]을 포함한다) 그는 전쟁을 국가상태에서 혼란상태로의 이행을 자연법이 지배하는 안정적인 곳에서 자연권을 휘두르는 불안한 곳으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철저한 유물론자인 그에게 이전 전쟁의 사례들은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는 “코먼웰스의 군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나라는 무너지게 된다고 말했다.
재밌는 점은 여기부터다. 그는 이 코먼웰스의 군대가 무너지고 나서, 국가가 무너지고 법률의 예외상태가 발생했을 때, 그렇다면 내가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최초에 인간은 모두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동등하다는 자신의 ‘늑대 상태’의 주장을 지키기 위해서 너와 나,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쓰고 듣는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통치자가 될 만한 그릇은 되지 못한다. 우리는 또 다른 통치자에게 우리의 권리를 의탁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의탁 과정은 잘 알겠지만 사회‘계약’이다. 어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발생하여 내전이 발생하였고 그 때문에 기존 법체계가 무너졌으며, 새로운 체계를 세우려는 합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개인이 ‘통치할 정도는 못 되지만 합의는 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논리적으로 조금 맞지 않는다. 불만 사항 때문에 일어난 내전이었을진대, 그 내전을 일으킨 사람들이 자신들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홉스 주장의 아이러니한 지점이 발생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안에 사는 사람들은 현 체제의 문제점을 잘 알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행동(내전)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계약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홉스의 절대통치자에 의해 완전히 닫힌 세계는 다시금 내전의 가능성으로 꿈틀거리게 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통치자는 완전한 절대주권으로 리바이어던 내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치하여야 한다. 그것이 단 하나의 권력으로 분열을 막아 이 국가를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치자는 자신의 정치가 국가 내의 개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와 그것이 극에 달하였을 때 내전의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역사가 말하듯 내전을 통해 코먼웰스가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곧 절대통치자가 인정하는 또 다른 권력이 탄생함을 뜻한다.
홉스는 이 아이러니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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