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형이상학 정초>란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하였던 윤리학(겸 인식론)에 대해 짧게 정리한 책이다. '3대 비판서' 라고 알려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중 자신이 결국 말하고 싶었던 윤리학에 대해 서술한 <실천이성비판>의 맛보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실제로 <순수이성비판>을 쓴 뒤 <실천이성비판> 을 쓰기 전에 칸트가 쓴 책이다). 이런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앞으로 몇 포스트 안으로 정리해 보는 연작을 작성하겠다. 그중에서 오늘은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의의에 대해 논해보겠다.
20세기 초 국내 칸트의 철학이 도입될 때부터 그랬지만, 한국에서 칸트는 '도덕철학자'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1946년 한국에 대학이 세워진 이래 2014년까지 한국 대학에서 나온 칸트철학 박사학위 89편 중 <순수이성비판>은 26권, <윤리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은 37편, <판단력비판>은 14편, 이들 모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12편이다. 이는 <순수이성비판> 등 이론철학에 대한 연구가 칸트 연구의 중심인 해외와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왜 발생했을까? 아마 한국사를 돌아보더라도 불교나 성리학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랬듯, 국내에서 사변이나 이론을 공한 것이라 여기고 실천에 관한 논의를 중요시하는 성향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일면 긍정적으로 보이나, 기초 과학 경시 혹은 인문학 괄시 등의 형태로 오늘날 드러나고 있다. 국내 학문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칸트 도덕철학에 대한 관심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지난 10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국내 윤리적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윤리학에 매진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의 윤리는 불교적, 유교적 색채가 짙었다. 이를 말하자면 자연주의적 전통 윤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자연주의적 전통 윤리는 '보은'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비유되는 부모님의 은혜 따위의 말이 이를 보여 준다. 여기에 20세기 들어 기독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초자연주의적인 계명 사상이 도덕 원칙으로 널리 퍼졌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4대 종교 중 3개 종교의 윤리 요소가 고르게 퍼진 사회가 되었다. 여기에 '선'의 가치를 '이'의 가치로 대치하는 공리주의와, 선의 가치를 무효로 만드는 물리주의와 유물론적 사상이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여러 윤리 체제가 제각기 고개를 들며 각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바, 대중들은 윤리가 윤리를 물어뜯는 상황을 보고 윤리 허무주의에 빠져 윤리를 외면하고 있다. 이때 보편적인 윤리 척도가 필요할 진대, 이는 옛 윤리의 복원이거나 새 윤리의 수립이 될 수도 있다.이때 어떤 사람들은 유교 윤리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새 윤리를 수립하고자 한다. 하지만 유교적 보은의 윤리는 친함과 온정을 동반하여 정이 있는 세상을 바라는 한국인들에게는 적합할지도 모르나, 보편적인 사회 윤리로써 작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유교 윤리에는 가까운 사람을 챙기고, 위계를 중시하며, 연고를 따지기 때문이다. 초월자를 내세와 내세를 윤리의 근간으로 삼는 기독교 윤리도 '지금'이 중요한 한국인들에게는 큰 반향을 얻기 어렵다. 때문에 칸트의 인격주의적인 자율적 의무의 윤리는 이 사회의 윤리를 세우는 근간으로써 혁혁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다만 '의무'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서양적인 것으로 우리에게는 차갑고 딱딱한 인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 떨어진다'는 말처럼 윤리가 그런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칸트의 윤리학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대단히 서양화되어 전체적인 문화 양상이 개변했기 때문에 '의무 윤리'라는 칸트의 개념이 뿌리내리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칸트의 철학을 국내에서 처음 접한 사람은 상당한 곤란에 빠질 것이다. 일단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으레 독일 철학이 그렇듯 언어로 단단한 성채를 지어 완전한 논리를 구사하려는 칸트의 글쓰기가 철학 독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생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어 번역 과정에서 칸트의 표현을 생생하게 옮기기 위해 직역하였기에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의 생소함과 어순이 뒤바뀐 문장이 독해를 어렵게 만든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 지면을 넘어 한 편의 논문을 써야 할 정도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덧붙이자면, 이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실천이성비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작품이기에 <실천이성비판>과 함께 펼쳐 보며 대조하며 읽는다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는 국어사전에 의미를 찾다 보면 결국 빙빙 돌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이는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대부분 이 책을 접할 파란색 칸트 전집 책에서는 (대부분 그렇지만)'직역'하였고, 칸트의 사소한 어휘들마저 국내에 옮기며 일관된 다른 어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학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칸트 철학에서의 중심 단어를 무엇으로 번역하느냐는 아직도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로, 더 관심 있는 독자라면 따로 찾아 봐야 하는 실정이다.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국내에 가지는 의미는 여기까지 살펴 보도록 하고, 다음 글에서는 <순수이성비판>의 이론철학에서 <실천이성비판>의 실천철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쓴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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