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물에서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국내에서 가지는 의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윤리형이상학 정초>의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먼저 칸트의 윤리학, 아니 오늘날 윤리학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생각한다면 도덕 철학이라는 칸트의 표현을 빌려 말하도록 하자. 칸트의 도덕 철학은 그가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쓰기 전 쓴 책인 <순수이성비판>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칸트는 도덕 철학을 윤리 '형이상학' 위에 세우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짧게 떠올려 보자. 감성과 오성, 이성이라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는 단어들부터 시작해 오성의 12범주, 순수 이성, 감성의 창, 감성의 잡다 등등 알 수 없는 단어가 즐비하다. 이런 개념어는 여기서 몰라도 좋다.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자. 칸트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윤리학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윤리라는 단어가 그러하듯 법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다. 여기서 윤리의 역설이 드러난다. 모두가 지키지 않으면 윤리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모두가 지키라고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윤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모두 같은 윤리를 지키며 산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썼다. 인간이 모두 다르다면 살아 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영국의 경험론도 가져왔다. 인간이 모두 같다면 그건 인간이 타고 난 이성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도 가져왔다. 인간이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그 경험은 몇 가지 범주화된 감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 화해를 이끌어 낸 이유는 칸트는 윤리학을 순수 이성의 영역에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수 이성이라고 하는, 감각의 여지가 끼어들 수 없다면 그것은 내용 면에서 공허한 것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행위들, 혹은 상황들에서 사용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어쨌든, 칸트는 윤리학을 순수이성의 영역에 올려 놓는 데 성공했다. 칸트에게 윤리학이란 순수한 당위의 법칙만을 내용으로 가져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긴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모든 인간은 적어도 같은 출발선 위에 설 수 있게 된다. 출발선이라고 한다면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선인가? 그건 바로 도덕적 삶을 통한 행복이다. 여기서 누군가 물을 수도 있겠다. 칸트에게 가장 유명한 말은 소위 '정언 명령'이라 불리는 것인데, 그곳에는 개인의 행복이 고려되지 않는 것 아니냐고. 그 말이 맞다. 때문에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그 행복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고 윤리적 존재가 윤리적 행복을 얻는 내세(신이 존재하는)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복잡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다루진 말도록 하자.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칸트는 일반 실천 철학과 윤리 형이상학을 구분한다. 일반 실천 철학은 경험적인 내용과 인간의 정욕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윤리 형이상학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가진 순수의지의 이념과 원리를 연구함으로써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칸트에게 윤리학이라는 학문은 윤리 '형이상학'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이 윤리 형이상학을 세우기 위해서는 <순수이성비판> 말미의 칸트가 자신의 완벽한 형이상학을 포기하면서, 심지어 그것이 내용 없는 사이비라고까지 비판하며 가져오고 싶어 한 개념인 '실천이성'이란 것이 필요하다. 순수이성'비판'이 순수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의 기능과 한계는 무엇인지 밝히는 '비판'이었다면 당연히 <실천이성비판>을 하기에 앞서 '실천이성'을 '비판'함은 칸트의 당연한 순리다.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실천이성비판>을 쓰기에 앞서 '실천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밝히는 저서다.
따라서 <윤리형이상학 정초>에는 보통 사람의 윤리 의식에서도 볼 수 있는 '선의지' 개념부터 정언 명령만이 도덕 법칙이 될 수 있다고 밝힌다. 이 도덕 법칙의 체계가 '목적들의 나라' 그 자체임을 밝혀서 '윤리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길을 연 뒤 다시금 도덕 법칙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인 '자유'에 대해서 묻는다. 정언 명령은 자유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 작업인 '실천이성 비판' 작업이 시작된다.
인간이 어떤 외적 동인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점을 설명하여, 한낱 속 빈 개념인 초월적 이념인 자유가 어떻게 도덕법칙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적인 이념인지 밝혀진다는 말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순수한 사변 이성인 개념이 실재성을 가진 양 선을 넘는 것을 비판하여 이성적인 '자연(존재론적인) 형이상학'이 불가능한데 밝힌 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경험을 통해 확립된 개념인 실천이성이 초험적이고 예지적인 영역까지 선을 넘는 것을 비판하고, '선의지'라는 것을 따라 도덕법칙을 준수하며 그런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최고선'의 개념을 확립 및 세계관을 형성함으로써 '윤리 형이상학'을 '정초'한다.
여기서 칸트의 유명한 말인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라는 문장이 나온다. 지금까지의 윤리학들은 도덕적인 행위를 할 때 어떤 이익이 주어지곤 했다. 기독교적인 내세에서의 행복이라던가, 그것이 내 평판을 올려 주어 언젠가 이익으로 돌아오는 등의 기대를 가지고 윤리적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를 거부한다. 윤리적 행위는 나의 경험과 완전히 유리되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 이성의 영역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보편적 입법이 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 이성이라는 것이 너무 선하여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프로그래밍 되었다면 어떤 행동은 윤리적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자유의 개념이 강조되는 것이다. 인간은 선한 행위를 할 수도, 그렇지 않은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이때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한 행위를 선택하기에 인간은 윤리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칸트 이전의 윤리학은 그렇지 못했다. 만약 이 이야기가 당연하다고 느껴진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칸트 윤리학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지금까지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에 대해 짧게 설명해 보았다. 절대로 두 포스트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만 가능한 요약하여 핵심만 전달하려 노력했다. 다음 시간에는 전반적인 철학사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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