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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몇 가지 정리 (2)

by 무면허고라니라이더 2023. 2. 21.

앞선 포스트에서는 철학에서 (말하자면) 주류라고 말해질 수 있는 철학적 논의를 끌어왔다. 이때 '주류'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성 중심 철학이었다는 뜻이다. 철학에서 대체로 이성 중심주의는 플라톤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주류로 평가받아 왔으나, 이성 중심주의가 불러온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게다가 홀로코스트라는 참사까지) 앞에서 서양 철학은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야기 할 철학 사조들은 이성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말하자면 '반이성주의', 오늘날 이 단어가 오염되었다는 점을 들어 다른 단어로 바꾸어 보자면 '의지주의 철학'에 대해 논해보겠다.

 

1. 의지주의 철학이 역사철학적으로 가지는 개념

 

역사철학은 개별자의 의지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의 의지가 어떠하였던, 그건 역사의 발전을 위하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철학사에서 의지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 것은 드물었다. 플라톤은 알고 있으면 당연히 행할 것이라는 식의 윤리학을 개진한다. 그에게 알고도 행하지 않았음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고 있음에도 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식의 주장까지는 나아가지 않지만, 어떤 것이 좋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종국에는) 추구하지 않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목표는 자기완성에 있고, 그 자기완성의 끝인 부동의 동자의 이름은 동시에 행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 대목은 이를 보증한다.

아무래도 이것은 최초에 이성을 강조했던 플라톤으로부터, 플라톤인 것과 플라톤 아닌 것으로 구분된 서양 철학에서의 관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성이 강조되면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같은 빵을 두고서 1000원과 1500원이라고 하면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1000원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투스가 진정한 하나님은 제멋대로 구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지적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변신론을 위해 플라톤을 끌어온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온 아퀴나스에 의해 신은 이성적이라고 오해하였기에 발생한 문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자유로움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중구난방, 천방지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가 지성을 통해 추론하여 올바른 선택으로 인도할 때자유롭다. 하지만 이 자유 개념이 신에게 적용될 경우 오해가 생긴다. 무소불위한 하나님이 과연 지성을 통해 추론하는가? 하나님은 자유로울진대, 지성에 의한 추론에 의해 인도된 선택을 따른다고 하면 완전한 지성을 가진 하나님은 1500원짜리 빵을 고르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다. 만약 1500원짜리 빵을 고른 경우, 어떤 배리背理를 상정해야 하는데, 완전한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말한다. 신은 자신보다 위에 있는 어떤 이성적 규준에 의해 제한받거나 결정을 제한받지 않는다. 신이 자유롭다면 그는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며, “그의 절대적 능력은 이성이 아닌 의지가 된다.” 따라서 신의 행위와 신이 내리는 도덕 명령은 의지의 행위고, 이는 곧 비이성적일 수 있다. 심지어, (실제로 그런 일은 잘 없겠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죄악도 저지를 수 있다.

스코투스와 오캄이 이성적 신을 몰아내고 진정 절대적인 신 개념을 가져옴으로써 중세를 끝내버렸으나, 근대 철학자들이 이들의 의지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스럽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만약 절대군주가 폭정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가?’ 라는 물음에 군주의 이성이 평화를 추구하라는 자연법의 제 1법칙을 준수하게 만들 것이기에 그럴 일은 잘 없다는 식으로 대답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거스틴-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이성적 신을 닮은 군주의 재림이다.

차라리 의지를 강조하는 것은 키에르케고어다. 그는 결단을 강조한다. 그에게 한 사람이 무엇이냐는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하는가에 달려 있다. 자유로운 자기는 결단한다. 결단이란 유한성과 무한성, 육체와 영혼을 종합하는 자기 의식적 행동이다. 이 결단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실존은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으로 구분되며, 결단의 내용에 따라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으로 구분된다. 그는 이 결단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도록 논증하는데, 그건 어떤 선택이던 윤리적 선택이라는 대목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심미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선택을 하지 않고, 윤리적인 것이 자신에게 선포된 후에 심미적인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심미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후자는 죄를 범하고 있다. 인간은 윤리적인 규정에 예속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윤리적인 것 위에 적혀 있는 상쇄 불가능한 본질이라는 낙인이다. 기존 철학에서는 대립되는 한 쌍이 있을 때,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대립을 화해시키려고 하지만 이는 허울 좋은 거짓이고, 이 대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건 화해가 아닌 선택이다.

그렇다면 키에르케고어에게 결단이 기존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결단과 크게 다른 점이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내용보다는 어떻게 선택하느냐는 형식이 더 중요하다.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행위, 그 형식이 더 중요하다.” 이때, 이 형식을 강조하는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된다. “나는 절대적으로 선택한다. 선택한다고 하면 그건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나의 영원한 타당성 속에 있는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아닌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서 결코 선택할 수 없다.” 나 자신을 선택하는 것, 그럼으로써 동시에 나에게 펼쳐진 이 자연이 나와 다른 이질적인 무엇이 아닌 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 태도를 통해 인간은 무한한 자아를 가지며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얻는다. 하지만 이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인간은 나를 선택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선택해야하는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종교적 색채를 가진다.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 선택을 버리고 부조리한 힘을 믿고 선택하게 됨으로써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간다. 이때 등장하는 사례가 그 유명한 이삭과 아브라함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는다. 이는 윤리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죽이려고 한 일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이삭을 바치려고 한 것이다. 윤리는 개별자를 보편자 아래 포섭한다. 윤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이라는 말은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말이다. 윤리적으로 보았을 때, 동시에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삭을 죽이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브라함의 살인 행위는 개별적 행위로 보자면 어떠한 윤리적 보편 아래로도 포섭될 수 없다. “아브라함은 부조리한 것의 힘을 빌려 행동한다. 왜냐하면 그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보다 위에 있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부조리한 일이니까. 이 역설은 매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매개를 가지고 행동하려는 순간, 그는 유혹에 빠져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 유혹에 빠져있다면 그는 결코 이삭을 희생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고, 혹시 이삭을 바쳤다고 해도 후회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뒤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조리한 것의 힘을 빌려 이삭을 되찾는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어떤 순간에도 비극적 영웅이 아니고, 그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다. , 살인자가 아니면 믿음의 사람이다.” 때문에 이삭을 죽이는 일은 순전히 개별적 행위다. 보편성에 따르면 이삭을 죽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보편성 속으로 개별성을 변증법적으로 매개했다면, 이삭을 죽이던 죽이지 않던 윤리적 선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삭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행위를 한다. 이는 비극도 아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행동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는 믿음의 기사다. 무엇을 믿느냐? 그건 하나님이다. 동시에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보다 위에 있다는 믿음이고, 이 개별적인 것이 절대적이라는 믿음이다. 이 역설은 신앙의 힘으로 완성된다. 인간 이성으로 부조리라 인식하는 무엇이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통해 부조리가 아니게 되는 역설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이성적 판단보다 더 높고 절대적인 결단이 있음을 주장한다. 동시에 이성적 판단이 가지는 보편성이 윤리적, 혹은 심미적이라고도 불릴 만한 범인凡人들의 윤리학이라는 것 또한 지적한다. 하지만 그의 논리의 완성에는 신이 존재한다. 신 앞에 선 단독자를 주장하며 모든 역설은 신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란 무엇인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보편자인 존재가 아닌가? 그의 실존주의는 분명 개별자를 강조하지만 어떤 동일성,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윤리적 동일성을 넘어선 절대적인 것이겠지만, 이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동일성이자 보편성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가 무한한 자아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도, 결국 자기를 선택함으로써 신과 함께할 수 있게 되고, 신의 섭리 속에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개별자를 선택했지만 보편자로 회귀했다. 우리가 의지를 강조한 바는, 1000원짜리 빵이 있고, 모두가 그것을 선택할 지라도 1500원빵을 선택할 수 있는 힘 아니었던가? 키에르케고어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내 결단이 1500원 빵을 선택하더라도 이 부조리가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는 설명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떤 보편자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한 것인가?

 

2. 칼 슈미트와 관계성 철학

 

슈미트라면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있다면,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그는 궁극적 토대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지를 문제 삼는다. 존재자가 존재에 의해 설명된다는 식의 논리를 부정한다는 말이다. 그는 기존 철학이 시도한 이성에 의한 근거 찾기를 부정한다. 그런 것은 없고 적극적 논쟁과 무한한 논쟁이 그 답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와 비슷한 논의를 정치정치적인 것의 비교를 통해 진행하는데, 그는 정치적 차이라는 말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시도한다. 정치적 차이는 현실 공간 속에서 세워지는 정치의 토대가 일시적, 우연적임을 인정케 한다. 정치적 차이는 현실 공간 속 정치가 기초 세우기기초 허물기의 끊임없는 유희라는 점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그의 정치 이론을 따라가자면, 기존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들은 아렌트주의적인 사유다. 인간적인 것을 상상하며 공동체성에 방점을 두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인간적인 것이란 없다. 이 세상은 갈등과 대립의 공간인 바, 누군가가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 깨진다는 말이다. 차라리 이 대립을 통해 등장하는 수많은 논의들이 무엇이 인간인지에 대한 대답을 더 잘해줄 수 있겠다.

그에 의하면, 갈등 상황은 비관여적이어서 비당파적인 제 삼자의 판단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극단적인 갈등 상황은 오로지 가담자만이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갈등이 누군가를 죽여야만 끝나는 감정 소모가 아니다. 이 갈등 상황에서 적은 개인적인 혐오의 대상이 아니며, 사적인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적을 죽여야만 끝나는 대립으로 생각하는 이 도덕적 선악의 구별은 무제한적 적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타자는 절대적 타자양립 불가능한 타자이지만, 정치적인 구별에 따르면 타자는 양립 가능한 타자이며 제한된 타자이다. 오히려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전쟁 의지가 더 비인간적이다.

 

3. 불교철학과 분석철학 속의 관계성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철학적 인간학동안 다룬 철학자들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을 전반적 살펴보면서, 우리는 슈미트를 제외한 모든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어떤 보편자를 상정했다는 말이다. 개별 인간들, 즉 존재자를 파악하기 위해 존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플라톤적이다. 마치 <국가>에서 시민의 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국가의 덕을 먼저 살펴보는 것에 논의 진행자들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에서 그들은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했던 사르트르 또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일은 보편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고, 보편자와 비교하여 개별자의 우위를 강조했던 키에르케고어 또한 더욱 더 큰 보편자인 하나님에 기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존재를 파악함으로써 존재자를 설명하고자 하는 이 논리는 너무나 설득력 있지만 2500년간 단 한 번이라도 성공했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중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담아내는 것에 성공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시도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슈미트와 현대 프랑스 철학이 지적하듯, 공통의 토대 따위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근거 세움이 부정될 때, 새로운 기초가 세워질 수 있다면, 어떤 보편자를 파악함으로써 개별자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이 논리 자체의 근거 또한 무너져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키에르케고어의 유한한 자아와 무한한 자아를 구분하는 부분에서 어느 정도 새로운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연(혹은 사회현상)이 하나의 물리적 법칙으로 나에게 현상할 때, 이들은 처음에는 낯설다. 이들은 나에게 맞서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그 대상과 맞설 때, 나는 유한하다. 하지만 이 현상을 어떤 법칙에 의해 이해하게 되면 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때 이 법칙은 나에게서 온다. 결국 자연현상, 사회현상은 나와 이질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나랑 똑같은 무엇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와 동떨어진 게 아니라 나랑 같은 것들. 이 둘의 관계는 둘 다 .

여기서 그의 논의는 절망으로 나아가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그의 지식이 더 이상 분별지에 머물지 않고 비분별지로 나아간다고 본다.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먼저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로 시작한다. 또한 유식불교는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대상은 없고,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다. 이 말은 곧 내 마음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막는 번뇌라는 것이다. 이 번뇌들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번뇌를 걷어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이 말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이 떠오른다. 어떤 존재가 이미 있고, 그 존재를 설명함으로써 존재자가 설명된다는 논리는, <논리철학논고>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는 초월적transzendetal이라는 주장과 맞닿아있지 않는가? 이 초월적인 논리에 의해 세계가 설명된다는 생각은 규칙 따르기는 하나의 (해석이 아닌) 실천이라고 말하는 <철학적 탐구>에서, 즉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부정된다. 우리가 한 대상을 파악함은 순전히 그 대상만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그 대상이 속해 있는 맥락을 파악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A의 본질은 B와 관계 맺을 때 있고, B의 본질 또한 A와 관계 맺을 때 있다고 말하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는 연기사상에 의해 고정불변한 아는 없다고 말하는 무아사상이 도출되고, 무아에 의해 연기가 도출되는 것과 같다.

오늘날 분석철학에 따르면, 개별자들을 파악하여 그것의 본질을 추상해내서 보편자를 논하던, 보편자를 파악하여 개별자를 설명하던, 둘 다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체스, 장기, 바둑 등 여러 놀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모두 파악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이들을 놀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본질과 같은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단지 비슷함, 즉 가족유사성만을 가지기에 우리가 같은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어떤 본질을 공유하여 같은 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인간이라는 것이 가지는 본질은 없고 비슷한 무언가를 두고서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를 뿐이다. 이는 콰인의 말을 빌리자면, 번역이 불확정되는 세계에서 우리가 번역을 성공하는 이유는 존재론적 상대성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슈미트의 논의는 검토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갈등과 대립의 공간으로써 정치를 상정한다, 공동체는 하나의 동종화된 일자가 있는 공간이 아닌 늘 타자를 상정해야하는 공간이 된다. 이 동종화는 끝없이 공동체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을 탄생시키고, 자신의 공동체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배제된 자들을 숨기고 억압하려고 하지만 갈등과 대립을 상상하는 자들은 외려 이들을 나와 동등한 하나의 주체로 상정하고 그들이 어딘가에 늘 존재함을 숨기지 않는다. 이 순간 인간은 관계에서부터 정의된다. 나라는 존재는 다른 누군가와 관계맺음으로써 존재한다.

지금까지 의지주의 철학에 대해 논해보았다. 듣는 당신은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쪽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는 철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인, 모든 것을 의심해 보고 모든 것에 물음표를 다는 태도를 놓지 말고 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의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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